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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 사전 3 - 리뷰 및 창작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존재함이란 실존주의

by 잡학사전1 2020. 10. 18.

작품을 읽는 시종일관 주인공은 마치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속에서의 이방인처럼 제 3자의 입장을 고수한다.
나느 이것이 작가의 연출된 '페르소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책을 읽은 뒤 많은 리뷰들을 찾아보고 나의 생각이 어느 정도는 근접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그 유명한 '알베르트 카뮈'의 「이방인」을 이제야 읽다니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읽어야지 읽어야지 마음만 계속 먹기를 수 차례 드디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게 되었다.

 

이방인이라는 단어의 유래를 찾아보니 이 또한 종교에서 유래한다. 본래 민족을 추구하던 종교주의적 색채에서 다른 개인을 추구하려는 이들에게 명칭을 붙이다보니 이방인이라는 단어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 모든 비유대인은 이방인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이 책의 주제는 너무나 극명하다. 실존주의적 성격을 지닌 작가의 사상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화자이자 주인공인 뫼르소는 기존의 관습, 인습, 예절, 종교에 대해 무조건적인 복종과 고수가 아닌 '자신의 방식'을 고집한다. 그것이 비록 약간은 반 종교적인,,,반 인습적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그래서 작가는 마치 현 세계에 던져진 이방인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주인공의 모습을 그린다. 이는  우리들에게 큰 시사점을 던져준다. 현대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일면복제와 같은, 모든이들이 추구하려는 가치들.. 그것은 대개 물질적으로 귀착하게 되는 것들일 것이다.... 흔한 예로 내 나이대로의 기준대로 생각한다면 취업의 필수옵션이 되어버린 듯한 느낌의 '스펙'과 같은 것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주인공은 그런 삶의 무조건적인 방식을  따르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서 주인공이 반소극적 실존주의를 주창하지 않았나 싶다. 어찌보면 극명한 삶의 선택은 아닐지라도, 그의 삶의 방식이 거부는 아니고, 그저 요즘말처럼 술에 물탄듯, 물에 술탄듯한 인상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단 그런 삶의 태도로 살아갈지라도 이는 우연을 통하여 살인을 저지르는 계기가 된다.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비추는 눈부신 태양빛이 우연히 살인을 저지르는 계기)

혹자는 그런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주체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선택이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할 수도 있겠다.  
그렇게 그의 인생을 180도 바뀌게 되는 인생에서의 선택..... 하지만 그것이 역시나 주인공과 화자의 선택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록 기존의 삶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을 소극적으로 고수해서 자신의 삶이 폭풍과 같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카뮈는 항상 저렇게 담배를 물고 존재의 실존에 대해서 곰곰히 생각했었을까?


특히나 사형선고를 받고 조용히 실존하는 나(주인공)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도중 갑자기 들이닥친 신부와의 교도소 안의 대화는 이런 실존주의적 태도를 더욱 확고히 하는 모습처럼 보인다.

시대를 막론하고 종교는 거대한 힘을 지녔으며, 이는 현대사회에 와서 더욱 두드러지게 된다.  특히나 요즘은 종교의 힘이 아주 매머드급이다. 당시 역시 이런 종교의 힘은 대동소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신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신부의 진부한 멘트가 기폭제라도 되듯이, 그의 감정선의 도화선을 폭발시키며 이런 말을 읊조리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는 종교론자들에게는 다소 거북한 장면으로 비춰질지도 모르겠다. 

아니...오히려 가끔은 부조리한 그래서 너무나 힘이 거대해져버린 종교에 대한 일침을 가하는 모습이 무종교론자들에게는 시원하기까지 할 수도 있겠다.
이런 멘트후에 신부는 눈물을 흘리며 교도소를 떠나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나 자신에 대한... 모든것에 대한 확신.. 그것은 너보다 강하다. 나의 인생과 덕쳐올 죽음에 대한 명확한 인식이 나에게는 있어..그렇다. 나에게는 이것밖에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이 진리를, 그것이 나를 붙들고 놓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굳게 붙들고 있다. 내 생각은 옳았고, 지금도 옳고, 또 언제나 옳으리라..'



알베르트 카뮈 「이방인」 中 에서...


이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적 입장을 보이는 사르트르와 그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라는 말을 통해 실존주의의 특성을 주장한다. 그렇다. 나도 개인적으로 이 말에 동의한다.

 

 


신은 아마도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겠다..(나는 종교를 믿지 않기에 이런 말이 가능하다.) 하지만 나는 신(종교)이란 것도 결국은 인간이 만들어낸 픽션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무언가의 기원에서 비롯된, 그러한 생각도 결국은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면 '지금 여기 존재하고 있는 나 자신' 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들어가는 존재로 보는 휴머니즘..그것이 바로 인간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간단하지 않을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실존주의의 사상에서 엿볼 수 있듯이 내가 혹은 이 글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끊임없는 자기선택과 인생안에서의 주체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더불어 그와 함께 끊임없는 자기완성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치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