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인생을 돈으로 환산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물질만능주의 시대에 살고 있는 작금의 사태는 그것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2020년의 최저시급 기준이 8590원이다. 4천원 인생은 지금으로부터 10년전 최저시급 기준으로 살아가는 인생을 주인공을 등장시킨다. 이는 누군가의 가난한 노동일기요 현장의 목소리다.
요즘은 고등학생 논술 추천 도서로 4천원 인생이 종종 추천된다고 하니
과거와 비교해 현재는 고등학생까지도 우리 삶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힘을 키워주려는 것 같아 다행이다.
그들이 나중에 진짜 어른이 되고 나서 노동자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들어 가기 위해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한번 생각해 보자... '하지만 사람의 인생의 가치가 4천원이라면 그건 너무나도 슬플 것 같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 당신에게
당신의 인생은 4천원이라고 말한다면 그건 당신에게 너무나 큰 충격일 것이다.
이 '4천원 인생'이라는 표현은 단지 표현을 통해 사람들의 연민의 부흥을 기대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시대에 살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와 일용직 근로자들의 처우를 알리고자 함이다.
그리고 처우의 알림을 통해서 사람들이 인식할 수 있게 하겠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 책을 보면 울어 벌리지도 모르겠다.
어떤 이들은 연민에서, 어떤 이들은 상상 해보지도 못했던 충격속에서
책과 함께 눈물을 떨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사람들의 인식이 조금씩 바뀔 수 있다면 필경에는 공정하지 못한
사회구조를 바꿀 수 있도록 하겠다는 바람인 것이다.
이들은 워킹푸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working poor
워킹푸어라는 말을 들어봤는지 모르겠다.
워킹푸어란 아무리 일을 해도(Working...).....(Poor)즉 가난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을 말한다.
아니 오히려 일을 할수록 가난해지는 상태를 맞기도 한다.
빈곤의 경계에 서 있는 이들..우리는 이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주어야 한다.
그런것이 바로 함께하는 삶이요, 공정한 사회일 것이다.
우리는 비록 같은 시간과 같은 공간속에 살고 있지만 ,
역설적이게도 필연적으로 다른 환경속에 살고 있다.
다른 환경속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이들은 또 다른 환경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아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안전한 테두리 안에서 공포와 슬픔 고통이라는
것은 맛보지 못하고 기쁨과 환희만을 맛보아서 늘상 이들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단지 인생이 단맛으로 포장된 초코쿠키와도 같다면 그런 그들의 의식과 행동에
변화를 주고 싶은 마음따위는 없다. 하지만 나는 이들의 의식에게 변화를 호소한다.
당신과 나의 삶과 그대들의 삶속에는 언제나 다양한 맛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불가항력적으로 맵고 쓴맛으로, 실패한 썩은 쿠키들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단지 책으로 영상으로 이들을 아는 것도 한계가 있다.
경험해보지 않고 그것을 안다고 말하는 이들은 분명 위선자들이며,
경험해보지 않고 그들을 이해한다고 말하는 것은 한낱 동정일 뿐이다.
그런 이유때문인지 이 책을 집필한 이들은 직접 위장취업을 한다.
우리시대의 4천원인생이라고 부를 수 있을법한 일용직근로자나,
비정규직 일터속으로 '기자'라는 신분을 버리고 말이다.
사실상 이들은 4천원 인생도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4천원에 못 미치는, 최저시급에도 못 미치는 현실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때로는 너무나 울분스럽고, 원통하다.
매일 그런생각이 들지 않음은, 시나브로 그런 억압적인 구조속에 익숙해져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식당아줌마, 마트총각, 외국인 노동자, 공장노동자로서의 삶이 그것이다.
모두 우리들의 일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다.
회사에서 식사를 하기 위해서 감자탕집을 들러 보았고,
집에서 생선요리를 먹기 위해 마트에 들러, 생선을 사 보았고,
학교에서 수업을 듣기 위해, 만들어진 의자와 책상에 앉아 보았고,
집에서 컴퓨터를 사용하기 위해 전원버튼을 누르고 모니터를 켜 보았을 것이다.
우리가 그러는 동안 다른 시간속에서는
감자탕속에는
생활비와 아이들의 교육비를 위해 종일 서서,
식사도 제때에 못 먹어 가며 감자탕집에서 일만 하는 어머니가 있었고,
비린내 나는 생선속에는
내일은 다른곳으로 쫓겨나지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마트가판대에서 하루인생을 기다리는 한많은 생선파는 청년이 있었고,
의자와 책상속에는
공장에서 대화가 통하지 않아, 온갖 욕을 들어가며
언제 경찰에게 잡힐까 사람보다 못한 처우를 받는 외국인 노동자가 있었고,
컴퓨터같은 기계속에는
단순반복으로 조립되는 컴퓨터와 리모컨과 같은 기계들처럼,
하루가 절망과 불안으로 조립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었다.
이들의 삶이 비록 누군가의 눈에는 하찮아 보일지라도, 또 다른 누군가의 눈에는 더없이 필요한 존재일 것이다.
그렇게 이들을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언제나 우리들이기를 바래본다.
사람은 누구나가 다 존중받아야 하는 권리가 있으며, 존중받아 마땅한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이는 인종으로서 국한되는 것도 아니고, 지위로서 국한되어서도 안 되며, 자본으로서 국한되어서도 안되는
불가침의 동등한 권리이자 의무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본주의에 너무 익숙해진 탓인지 현대사회속에서 그 권리와 의무를
물질속에 이양시켜버린듯 하다.
신경숙의 소설중 외딴방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7~80년대 공장에서는 산업체특별학급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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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에 다니면 야간에 학교에 다닐 수 있도록 그렇게 하여 최소소양수준이라는 학교검정을 얻을 수 있도록 했던 취지의 정책이었다.
소설속에 등장하는 산업체 특별학급을 가르치던 교사의 말이다.
'근무지가 소위 명문여고였고, 영등포여고 주간에서도 일년 있었기 때문에 세 그룹의 학생들을 비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서로 다른 환경의 학생들의 꿈과 희망과, 절망의 양이나 질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느끼게 된 것입니다.'
이는 서로 다른 환경에 살고 있기 때문에 꿈의 크기는 비록 다를지라도, 그 꿈의 질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모두의 꿈은 무언가를 향해 비상하려는 그 본질이 같을 것이다.
감자탕집에서 일하는 중년의 여성은 누군가의 엄마이고,
마트에서 생선을 파는 청년는 누군가의 오빠이자 형이고,
공장에서 기계를 조립하는 중년의 남성은 누군가의 아빠이다.
그리고 이들 역시도 청춘의 짙고 푸른 꿈이 있었다. 아니 지금도 그 꿈은 작게나마 살아 있을 것이다.
다만 빛이 바래 보이지 않을 뿐이다. 나의 아빠도, 나의 엄마도, 나의 오빠이자, 형도 그리고 당신도...
꿈의 본질은 다르지 않다.
오늘도 우리들의 누군가는 그 본질을 품에 안은 채 자식을 위해서, 동생을 위해서 불확실한 삶의 전쟁터로
나가는 중이다. 이 전쟁터속에서 누가 그들의 꿈을 지켜줄 것인가?
그 꿈을 내가 지켜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 꿈을 당신이 지켜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소박하지만 그 꿈을 우리가 지켜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소박하지만 우리 모두가 그 공정한 꿈이 이루어지기를, 공정한 사회가 이루어지기를
한날 한시에 다같이 바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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